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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ver Let Me Go (2010)

2011/01/16 22:21 posted by Yochael, at the commentary/movie

'Never Let Me Go'의 예고편을 처음 보았을 때 들었던 생각이 왜 장르가 Sci-Fi일까 하는 것이었다. 캐리 멀리건과 키이라 나이틀리가 주연한 공상과학 영화는 심형래 주연의 멜로영화나 김병만, 이수근 주연의 성장영화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색이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이가 도전정신이 결여된 궤적을 산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가 않다. 짐 캐리가 '이터널 선샤인'을 선택했을 때, 이범수가 '외과의사 봉달희'를 선택했을 때와 같은 모험감을 안고 이 영화를 봐 줘야 겠고나 생각했다.



이 영화의 포스터가 갖는 이미지는 두근두근 콩닥콩닥하는 성장 연애영화, 이 영화의 예고편에 흐르는 분위기는 우울하고 나른해서 볼 때마다 마음을 저미게 만드는 본격 영국 하이틴 로맨스. 특히나 문제는 영화의 때깔인데, 이게 어디 공상과학 SF에다 무려 스릴러라는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참고로 감독 마크 로마넥은 뮤직비디오 작업을 주로 해 온 유명한 비주얼 아티스트)


Copyright © 2010 Fox Searchlight Pictures

자, 그럼 지금부터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찬사를 시작한다. 

슬프고 우울한 영화가 땡길 때가 있다. 그러한 영화를 보고 난 후에 가질 수 있는 효용은 크게 두 가지 인데, 그 첫번째는 심리적 위안을 목적으로 하는 감정 '자위'이고 그 두번째는 슬픔이란 감정에 대한 자기 환기 욕구. 즉, 슬픔과 우울함이라는 감정안에 일시적으로 퐁당 빠지는 과정을 통해 쾌감을 얻는 일종의 엔터테인먼트 '자극'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웃긴 건 그 자극의 정도가 극심해 만 하루를 넘어 3일이라는 시간 내내 나의 감정을 우울한 상태로 지속 시켰다는 점이다. 영화 속 분위기에 폭 싸여 있다가도 이내 훌훌 털고 일어서야 하는데 이 영화는 참 질기게 긴 여운을 남긴다. 시종일관 정신없이 웃음과 눈물을 폭풍처럼 쏟게 만들다가도 끝나면 이내 귀신같이 사그라드는 영화와 내내 지루하고 잔잔해서 보는 게 조금 고통일지라도 끝나고 나면 오랜 시간 짙게 잔향을 남기는 영화가 있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는 후자. 그래서 이 영화는 참 괜찮은 영화다. 또한 수면제 역할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감정을 응축하고 토해내는 방식이 끝으로 가면 갈 수록 너무도 처절해서 자칫 심각한 심리적 병폐를 양산해 내기도 하겠다. 그러므로 약간의 우울함을 평소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 나와같이 찬탄해 마지않는 사람에게는 정답이 없다. 인생이란 늘 그런 것이니까.


Copyright © 2010 Fox Searchlight Pictures

SF 스릴러 딱지가 붙은 이유는 헤일샴이라는 기숙학교에서 일반인과 철저히 격리된 채 장기기증자로서의 삶을 살아온 이 아이들이 사실은 복제인간이란 것이다.

'1978년의 헤일샴'은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자막에서의 센세이션과 같이 (1952년의 의학 혁명에 의해 모든 불치병은 사라지고 마침내 인류의 평균수명이 1967년에 이르러 100세를 돌파했다는 설정처럼) 휘황찬란하거나 초현대적이지 않다. 의학 분야의 눈부신 발전에 비해 타 분야의 발전 속도는 상대적으로 더딘 듯 한 이 이상한 동네의 어느 학교에서 캐시와 루스, 토미가 자란다. 복제인간으로 태어나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비관하는 대신 담담히 케어러(Carer) 혹은 도너(Donor)로서의 짧은 생을 받아 들인다. 이타적인 이 아이들의 캐릭터를 대변하는 주인공이 바로 캐시. 감정 절제가 되지 않는 어린 토미에게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주고 둘은 서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늘 매사 보다 적극적인 루스에게 가 버리는 토미를 그저 옆에서 바라보기만 한다. 캐시는 매번 자기 주변을 감싸고 있는 단단한 규정과 법칙의 벽을 깨고 나아갈 마음이 없어 보인다. 그저 바라보고 받아들이고를 반복하는 사이 이들은 성장하며, 실타래처럼 얽혀있던 자신들의 삶이 빠르게 풀려 간다고 자각하는 사이 첫번째 기증을 끝낸 루스 그리고 토미와 다시 재회한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캐시와 토미. 단 한번이라도 이 둘은 자신들의 운명 안에서 진정 원하던 행복의 시간을 가지게 될 수 있을까?


Copyright © 2010 Fox Searchlight Pictures

마크 로마넥 감독은 일본계 영국작가 카즈오 이시구로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에서 본인 특유의 미학적 센스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영화는 SF 스릴러로 분류된 장르적 제한엔 아랑곳 없이 등장하는 배경마다 유려한 풍광을 자랑한다. 이 유려한 풍광이란 것이 영화의 암울한 분위기와 맞 닿게 잔뜩 흐린 날씨와 차디찬 병원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새차게 부는 바람과 뉘엇뉘엇 석양이 지는 태양빛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외롭게 홀로 놓인 고깃배를 향해 텅빈 해변을 가로 지르는 토미, 철책에 걸린 헝겊이 모진 바람에 찢겨 나부끼는 가운데 석양을 맞으며 홀로 서 있는 캐시를 비추는 화면은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석양이 지는 바닷가 그 끝엔 등대가 놓여져 있고 등대를 향해 곧게 뻗은 벤치 위에 아이들은 위태롭게 서로를 바라보며 앉아 있다. 인적이 없는 어둡고 좁은 시골길을 달리던 자동차에서 토미가 내린다. 마침내 토미가 마음 속 깊은 곳에 억눌려 있던 절규를 토해 낸다. 


Copyright © 2010 Fox Searchlight Pictures

위태롭게 혹은 아슬아슬하게 버티며 서 있던 잔인한 현실 속에서 가느다란 행복의 희망이 드디어 한 움큼의 싹을 틔우려는 찰나 복제에 불과한 자신들의 하찮은 감정과 희망엔 아랑곳 없이 가진 자의 이기심과 안위를 위해 존재하는 세상. Completion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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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달리는 소녀, 2006

2010/03/25 16:17 posted by Yochael, at the commentary/movie

이동진의 영화풍경

마음이 흔들렸다. 여진이 길었다. 호소다 마모루의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6월14일 개봉)는 여름날 햇살의 강렬함과 강변의 평화로움과 수업이 끝난 학교 운동장의 고요함과 일요일 오후의 나른함을 안다. 

이와 동시에, 이 작품이 하늘을 가장 인상적으로 담아낸 애니메이션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힘차게 던진 야구공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푸른 하늘, 자전거 뒷좌석에 앉아 고개를 젖힐 때 석양에 채색된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는 해질녘 하늘, 제트기가 곧게 뻗은 비행운(飛行雲)을 남기며 멀어지는 아득한 하늘. 그리고 그 하늘 아래엔 언제나 한 소녀가 있다. 부딪치고 넘어지고 구르고 달리면서 온 몸으로 삶을 배우는 어느 소녀.

늘 허둥대고 덜렁대면서 실수를 연발하는 여고생 마코토에게는 함께 우정을 나누는 남학생 친구 치아키와 고스케가 있다. 어느날 과학실에서 호두 모양의 이상한 물건을 발견한 뒤부터 마코토에겐 시간을 뛰어넘어 가까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 리프’ 능력이 생긴다. 타임 리프 덕분에 지각도 면하고 성적도 좋아지던 마코토는 친구로만 알던 치아키가 갑자기 남녀관계로 사귀자고 제안해오자 당황한다. 

시간을 뛰어넘게 된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시간여행 모티브를 진기한 볼거리의 연료로 소비하는 대신, 미세하고 여린 마음의 결을 섬세하게 포착해내는데 사용함으로써 전혀 다른 판타지를 그려냈다. 마코토는 그 능력을 테러리스트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나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에 대항하기 위해서 발휘하지 않는다. 노래방 이용 시간을 공짜로 늘리고 싶거나, 갑작스레 맞닥뜨린 사랑의 문 앞에서 망설일 때, 충동적으로 사용한다. 

횟수가 제한된 타임 리프 능력을 쓸 필요 없을 때 쓰거나, 써야 할 때 쓰지 못하는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소녀는 불현듯 성장한다. 마음껏 시간을 넘나드는 능력을 갖게 된 아이가 역설적으로 깨닫는 것이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 지금 이 순간에는 미루지 말고 반드시 내 스스로 결정해야 할 일들이 있다는 것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40년 넘도록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아온 츠츠이 야스타카의 원작 소설 속편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멋지게 옮겨냈다. 패닝(카메라의 좌우 움직임)의 효과를 적절히 살렸고 롱쇼트(멀리찍기)의 아득함을 마음의 풍경으로 생생히 바꾸어냈다. 원경의 시계에 초점을 맞추면서 근경의 인물을 포커스 아웃시키는 장면처럼 인상적인 터치가 두드러지는 부분도 많다. 심리의 여백을 공간의 정적으로 그려내는 사운드 운용술도 뛰어나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사다모토 요시유키가 디자인한 캐릭터들은 하나 같이 사랑스럽고, ‘모노노케 히메’와 ‘천공의 성 라퓨타’에 참여했던 미술감독 야마모토 니조의 섬세한 표현력은 지극히 인상적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관람 후 며칠이 지나도록 많은 장면들이 머리 속에서 꼬리를 물고 리플레이되는 체험을 안긴다. 무엇보다 강력한 것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강변에서 꼼짝않고 서 있는 마코토를 롱쇼트로 담아내는 장면과, 치아키를 찾아 달릴 때 빠르게 왼쪽으로 질주하는 카메라에 뒤져 화면 밖으로 밀려나던 마코토가 사력을 다해 결국 패닝의 스피드를 넘어서는 장면이다. 잠시 멈춰 선 세상의 화폭 속에 그 자신 정물이 된 채 들어앉기, 혹은 아찔한 시간의 속도 속에서도 스스로를 잃지 않기. 성장이란 그 둘 사이의 불안한 진자 운동 속에서 갑자기 배달되는 세월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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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CKBACK FROM kimyochael's me2DAY 2010/04/14 03:52

    시간을 달리는 소녀, 2006: 마음이 흔들렸다. 여진이 길었다. 호소다 마모루의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6월14일 개봉)는 여름날 햇살의 강렬함과 강변의 평화로움과 수업이 끝난… http://kimyochael.com/91


사실 이건 비밀인데, 올 가을엔 아이들 둘과 함께 지리산을 종주키로 합의하였다. 한 아이는 대학원 조교 1년차의 눈칫밥으로 인해 시험기간이라야 합류한다는 조건부 합의였지만 다시 둘도 없을 이번 기회를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를 할 것 같아서 합의를 강행하였다.

그리고 오늘 새벽엔 갑자기 캠핑이 하고 싶어져서 문득 이 영화가 떠올랐다. 이안감독의 이 영화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한가로운 저 브로크백에서의 방목겸 캠핑을 떠올리기보다 그에 앞서 히스 레저와 제이크 질렌할의 텐트안의 동침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나는 그것에 관해 아주 난감했던 경험이 있는데, 군생활 하는 동안에 나는 주말마다 지휘통제실의 빔프로젝터를 우리 부대 안보교육관으로 가져다가 아이들에게 영화를 틀어주곤 했었다. 물론 나의 성향상 대중성이 강한 영화를 고르기보다 내 취향의 실험성이 높은 영화를 주로 고르곤 했었다. (그 예가 바로 난해한 코미디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과 '이터널 선샤인' '더 퀸' 헤헤) 돌이켜보면 그것들은 분명 군부대에서 틀어주면 안되는 영화들이었다. 그리고 그날의 나의 선택이 바로 이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이었다.


바로 몇주전에 오스카가 이안감독에게 동양인 최초의 감독상을 안겨준 이 영화를 나는 무조건적으로 신뢰했다. 다만 그 무조건적인 신뢰에 이 영화의 소재로 쓰인 남성간의 동성애코드는 무참히 묻혀져 버렸다. 나는 이때 당시 영화를 고르는 것이 대단히도 귀찮아서 예고편만 보고 좋으면 바로 오케이였다. 그리고 오늘은 무조건 재밌어. 예술성 가득한 영화로 너희들의 감수성을 최대한 끌어올려 보겠다. 하며 자신만만하게 영화를 틀고 나서 채 30분도 되지 못해, 히스레저와 제이크 질렌할이 위스키를 나눠 마시고 텐트안으로 들어가 동침을 하는 장면이 나오고 수십명의 군인들이 주황색 활동복을 입고 모인 그 안보통제실의 분위기는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이 경직되고 말았다.

이성의 존재에 굶주려 있는 이들에게 자칫 성적 정체성의 혼란을 줄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흠칫 스쳐지나갔다. 드디어 그 경직을 이기지 못한 고참 몇명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노려보며 안보통제실을 뛰쳐나갔고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 하고 있는 우리 소대 후임들 몇명만이 숨을 죽이고 스크린과 나의 눈빛을 교대로 살피고 있었다. 얘들아 미안해. 오늘은 나의 결정적인 미스였다. 오늘은 일찍 올라가서 쉬도록 하자꾸나. 이 날의 영화 상영은 그야말로 대 실패였다. 그 이후로 나는 화장실에서라든지 샤워장에서 나의 성정체성에 관해 혼란스러워하는 동료들의 따가운 눈총을 감수해야만 했다. 아무리 오스카가 선택한 걸작이라도 어느 시간과 어느 공간에서는 절대 어울릴 수 없는 것도 있겠다 싶었다. 혹시 그 자리에서 그 영화를 보고 나의 이야기다 싶은 아이도 있었을까? 그런 고민을 내게 털어놓고 싶어 인사과 앞을 서성이던 아이가 혹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런 상황이 생겨버렸다면 나는 그 아이에게 뭐라고 이야기해줘야 했을까? 아찔하다. 그리고 다행이다.



그때 미처 다 보지 못했던 영화를 새벽에 혼자 다 보았다. 인생을 살면서 때때로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만나게 될때 그것이 거대한 사회적 지탄을 받고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을 평생 마음 한켠에 묻고 살아가야 한다면 그럴 수 있는 용기가 나에게도 있을까? 글쎄. 당장 이번 가을 지리산에서 둘 중 한 녀석이 내게 사실은 너를 사랑했노라 고백하지만 않는다면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그랬듯 나는 동성보다는 역시 이성에게 마음이 끌릴 것이기에 다행히 거대한 사회적 지탄을 받는다거나 견딜 수 없는 죄책감에 평생 마음 한켠을 내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찔하다. 그리고 다행이다.

한 평생 가슴 한켠에 그리움과 죄책감을 동시에 묻고 살아오다 냉정한 세상사람들에게 무참히 죽어버린 잭. 맘껏 목놓아 울 수 없어 잭의 셔츠를 가슴을 파묻은 채 숨죽여 흐느끼는 에니스. 예의 다른 러브스토리와는 다른 감정선으로 나를 자극한다. 그리고 역시 이 영화는 음악까지도 마음에 든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번 가을에 예정대로 등산을 가게 되면 이 영화말고 다른 영화를 들고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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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최근의 팔자가 너무도 나긋했기 때문일까?

따뜻하게 햇살이 내려쬐다가도 이따금 축축하게 비가 내리는 그 날씨의 탓일수도 있고 의욕이 가득 차올라 일주일째 수영장을 다니다가 어디선가 정체모를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수도 있을거다. 어제 목이 좀 칼칼한 가운데에도 학회 아이들을 데리고 축구를 한게 역시나 오바였던지 하루종일 콧물이 멈추지 않고 흐르는 콧물감기가 들렸다. 이비인후과에 가서 콧속으로 약물을 쇽쇽 뿜어넣는 치료를 받고 돌아와 하루치 약을 6시간만에 집중 내복하고 나서 헤롱헤롱 거리는 심신을 안고 이 영화를 관조했다.



사랑을 부르는 파리(Paris, 2008)



원제가 'Paris'인 이 영화는 내내 건조하고 맹맹하지만 활력은 아니래도 삶의 설레임쯤은 느낄 수 있는 영화이다. 영화는 구성적인 면에서 최근의 러브 액츄얼리와도 같은 예전 그 테마게임(MBC의 테마게임을 기억하는 사람?)의 구성을 지녔지만 러브 액츄얼리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처럼 인물들간의 인과관계가 극적인 요소로서 덜 적극적이고 (극단적으로는 이러한 장치가 불필요하게까지 보인다.) 이야기의 중심을 쥐고 풀어내는 역할을 하는게 아니라 외양에서 이 영화의 전체를 풀어내는 감독의 의도로서 오버랩된다.

그래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 이야기에서 꼭 필요한 사건을 쥐고 있기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이 순간에 파리라는 도시를 구성하는 인물들 중 무작위로 선택된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가 파리라는 도시를 좀 더 역설적으로 의미하는 영화가 되었고 감독은 제목을 'Paris'라고 지었을 터. 역시나 그들에게 파리라는 도시는 타지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관광지가 아니라 자신이 오늘도 숨을 쉬고 걸음을 내딪고 눈물을 흘리며 낄낄 웃음도 터트리는 삶과 생의 공간인 것이다. 그 안에는 당연 사랑과 행복이 있고 그리움과 눈물도 있으며 태어남과 죽음도 공존한다. 그리고 그 경계에서 부대끼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영화의 본질을 생각하면 '사랑을 부르는 파리'라는 제목을 갖다붙인 이의 심정이 참으로 애석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째서 파리라는 동네는 '사랑'만 뭉게뭉게 피어오를 수 있단 말이냐? 다만, 로맨틱하게 들리는 그 제목이 마케팅을 해야하는 세일즈맨의 심정으로는 더 탁월했을터. 그래도 그렇지. (결론적으로 흥행과는 거리가 멀어졌으니, 그 꼼수는 대실패임) 감독은 괜히 원제를 노멀하고 맹맹하게 지었을까? 그 의도 자체가 오류인 관계로 이 영화는 원제를 그대로 살렸어야 했다.


이 영화의 것 그대로 감독의 조근조근하고 낭낭한 공기를 그냥 그대로 나의 일상과 대비하여 체득하자면 그건 또 공감 반 비공감 반 이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에게 부여되는 좌절감이 그리 짧을 수만은 없을테고, 거부된 사랑의 상처가 또 그리 쿨할 수만은 없을테니까. 근데, 또 다만 그러한 감독의 인간사를 향한 터치가 유쾌한 삶의 한 이면이라면. 뭐 어차피 내가 느끼는 좌절감과 배신감에 굴하지 않고 흘러가는게 또 세상의 삶이니, 결국 이게 아니러니고 인생이고 그게 그거인거다. 영화가 끝나고 나니, 공감 반 비공감 반, 아이러니와 동질감, 거기서 거기, 애매모호함으로 뒤죽박죽이다.

아. 참! 영화를 보면서 내내 키득거렸다. 어쩜 그렇게 그 인물들의 삶의 순간순간이 감독을 만나 보석처럼 반짝반짝 유쾌해질 수 있을까? 정말 이게 파리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어지게 만든다니까. 누구의 말처럼 이 영화는 파리를 방문하고 싶게 만드는 영화가 아니라 파리에서 한번쯤 살고 싶게 만드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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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 대한 평가가 양 극단으로 갈려서 (마치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이념적 구도와 같이 갈라 나눠선 땅에서 서로를 헐뜯고 혐오하고 비난하고 하는 현재의 상황은 이 영화에서 처럼 무수한 메타포의 떡밥이 넘실넘실 거리는 바다를 지나자 오늘날 우리의 현실과 맞닿았고) 결론적으로 나에겐 무척이나 아이러니 그 자체. 실소임. 좌우앞뒤 맥략엔 관심없이 맹렬히 계란만 던지는 한국인의 유전자는 원래부터 그런건가봐요. 협소한 나의 짧은 견해로는 이 영화를 비하하는 사람들의 논리가 무척이나 황당하고 좌절스럽다.................생략



참고로 이 영화는 내가 개봉일에 맞춰 득달같이 달려 나가 본 영화 그 두번째이다. 참고로 2. 내 생각에 이 영화는 걸작이다. 그 첫번째 영화에서처럼 두번 세번은 봐줘야 한다.

on the other hand.


(마치 디워와 같이) 극단으로 갈린 사람들이 영화에 관한 생각을 쏟아내고 있는걸 보고 있자니 문득 박찬욱 감독이 부러워졌다. 감히 부러워할 수 없다면 조용히 닥치고 찬탄해 마지 않겠어. 당신이 본 것과 같이 이 영화는 내내 붉은 혈흔이 낭자하고 팔꿈치에서 뼈마디가 살을 찢고 나오며 여배우는 쉼 없이 옷을 벗는다. 뿐만 아니라 천주교 사제가 뱀파이어가 되고 친구의 아내와 금지된 욕정을 나누고 친구를 살해하고 그 처절한 바닥을 향해 나아가는 걸 돈을 내고 앉아 보고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는 건 이해한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저질 쓰레기고 포르노라고 하고 송강호의 노출을 노이즈마케팅이라고 치부하다니. 사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들었던 가장 커다란 아쉬움 하나는 송강호의 노출에 대한 이슈가 없었더라면 더 좋았겠다. 아마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영화 내내 그 장면을 걱정반 기대반 하며 기다렸을테고 그렇게 억압되고 제어된 선입견 때문에 정작 그렇게 연출한 감독의 의도나 연기한 배우의 의도는 간과한 채, 의미가 이탈해버린 장면만 본 건 아닌가 싶다. 영화가 하는 이야기 전체를 놓고 보면 그 장면은 충분히 수긍이 가고 설득적이다 못해 너무도 강렬해 (배우의 말을 빌리자면) 숭고함이 느껴질 정도인데, 그렇게까지 표현할 필요가 있겠냐고 묻는 것 자체가 그 감독에 대한 모독인 동시에 돈을 내고 그 자리에 앉았는 당신에 대한 아이러니이고 모독이며 결국엔 누워서 침뱉는 꼴이다. 좌우앞뒤 맥락없이는 이해시킬 수 없으니 직접 가서 봐.



이 사람은 분명히 해외에서도 작가라 칭송받을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세계적인 미쟝센을 지닌 감독이다. 영상과 미학에 대한 타고난 감각은 기본인 동시에 (이걸 보고 어찌 그의 감각이 basic의 수준이라고 할까만은) 그의 영화는 문학적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이다. 그가 시상식에서 후배 영화감독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로 책을 보라, 문학만이 자네들이 살길이라고 했다. 이것이 그의 미쟝센을 현악적인 문학의 한 갈레로 이끈 원동력일까?

늘 외롭게 자랐지만 사제로서 희생정신도 남달랐던 상현이 뱀파이어가 되어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욕망을 갈구하는 도중에 그가 느끼게 되는 감정의 가장 커다란 플롯은 죄의식이었다. 영화의 종반부 최후의 순간까지 리여사를 버리지 못하고 마치 양 어깨에 무겁게 짖눌리고 있는 죄의식을 잔인한 자기자학의 순교의식과도 같이 뒷좌석에 태운 상현을 봐. 친구의 아내와 정사를 나누는 도중에 물속에서 무거운 돌에 짖눌린 친구의 환상이 보이는 너무도 시크하고 관능적이고 강렬한 그 장면들을 보란 말이야. 아아아아아 이건 뭐 거대한 쇼크. 300줄 차지 샷 쿵



처음 영화를 보고 나왔을때 머릿속에 상현의 이미지보다 태주의 잔상이 많이 남았다. 그녀는 그 나이에 그 커리어에 비할 수 없는 반전과도 같은 작품을 만난 듯 하다. 자기 본래의 본성과 어울릴 수 없는 일상의 지루함에 억눌린 이유로 자기망상의 편집증적인 심리상태에서부터,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을 갈구하는 거대한 팜므파탈의 눈빛까지 그녀의 보이스와 표정, 눈빛, 몸짓 하나하나가 태주 그 자체였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다세포소녀의 비효용적인 그녀의 커리어는 박쥐를 만나 비로소 일대 전기를 맞을 것으로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여운이 깊은 송강호와 영화 내내 강렬한 에너지가 넘치는 김옥빈의 연기 앙상블은 최적. 황금종려상보다 남우주연이나 여우주연을 노려야 하는 건 아닐지..

여기까지가 박쥐에 관한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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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박쥐’, 박찬욱 감독 새로운 진화를 하고 있는가? 삭제

    TRACKBACK FROM 영화리뷰전문 무비조이 2009/05/08 07:51

    박찬욱 감독의 화제작 <박쥐>가 개봉했다. 이 작품은 주연 송강호의 성기 노출이 초미의 화제가 될 만큼 현재진행형으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또한 <박쥐>는 언론시사회를 마친 후 여러 가지 단평과 의견들이 물밀듯이 나오고 있는 중이다. 이런 관심과 여러 가지 평가는 <올드보이>(2003년)때를 생각나게 한다. 당시 이 작품이 나왔을 때 여러 가지 의





(최근 공개된 두 신작의 티져영상, 티져안의 몇몇 장면은 묘하게 미학적 구도가 비슷하게도 보인다.)



2006년 봉준호의 '괴물'과 박찬욱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이후 3년간의 긴 호흡을 끝내고 다시 2009년 상반기 박찬욱은 '박쥐'를 봉준호는 '마더'를 품에서 꺼내 놓는다. 그간 이 둘의 작품이 없었던 한국영화는 대단한 침체기, 말못할 빈곤기와 위축기를 지났는데 이 둘의 신작이 한달 범위 안의 간격을 두고 격돌할 예정이다.

2000년대에 들어 한국영화의 눈부신 외적성장을 선두에서 이끈 두 감독의 신작은 그간 이렇다할 기대작없이 전전긍긍했던 한국영화계에 모처럼만의 활력소를 불어넣을 듯한 기세다. 한국영화사에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작가적, 그리고 상업적 완성도를 그려온 두 감독. 이번 신작을 통해서 이전작들에서 보여준 인간 내면을 집중해부하는 듯한 심리적 묘사와 함께 두 감독의 영화적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내는 정교하고 자로 잰듯한, 강박증 환자와도 같은 연출력의 펀치를 다시한번 관객들에게 선사할 수 있을 지 기대된다.



박찬욱의 '박쥐'는 흡혈귀가 된 사제가 종교적 신념과 인간의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밀도있게 그린 작품이다. 그의 이전작들에서 처럼 들추고 싶지 않은 인간 심리의 최하저점까지 파고야 마는 그의 작가적 근성이 이번 작품에서 어떠한 영화적 자극으로 관객들에게 전달될지 벌써부터 기대되는 작품이다. 봉준호의 '마더'는 살인자로 내몰린 자식을 구하려 사투를 벌이는 어머니의 이야기이다. 한명의 살인자에게 철저하게 무기력한 공권력을 응시하는 무거운 사회적 시선, 나른하게 잊혀져만 가는 역할룰에 정체성마저 상실한 채 사회로부터 늘 소외되고 희생되는 아버지를 응시하는 그의 아련한 시선. 이번에는 한국적 어머니상으로 대표되는 배우 김혜자를 통해 본능적인 모성에 대한 강렬한 시선으로 관객을 만난다.

박쥐의 개봉일은 4월 29일로 확정되었고, 마더의 개봉일은 5월 중순 이내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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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끝에 다다라 혹은 서른에 접어들면 누구나 결혼을 꿈꾸고 안정된 직장과 단란한 가정을 꾸릴 희망에 부푼다. 이들에게 이 영화가 잔인한 질문을 던진다. "네 안에 있는 진정 행복한 삶이란 그것이 다가 아니야.."

결혼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나이가 되어도 역시 그러하지. 진로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꿈과 이상 그리고 현실의 이중적 잣대는 늘 그들을 가장 불안하게 하고 조바심나게 하며 삶의 방향성 마저 상실하게 만들어 버린다. 나의 미래에 관한 주변사람들의 충고는 대부분 좋은 학벌과 철밥통과도 같은 안정된 직장으로 시작해서 그들이 정상적인 항로라고 주장하는 완벽한 결혼과 안정된 가정으로 대단원의 마침표를 찍는다.

열변을 토해내는 그들을 향해 나는 언제나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하고 앉아 있다. 그리고 그 끝에 다다라 인생의 모든 목적이 결국 물질적인 안정과 경제적 여유로 귀결되는 그 이야기는 나를 이내 완전히 매료시키고 만다. 종속되고 만다. 그 이야기안엔 늘 나의 꿈이나 이상적인 삶의 목표, 보람, 직업적 자부심 같은건 애당초 언급조차 되지 않는데 말야. 그도 그럴것이 내게 꿈이나 이상을 물어보던 인생의 조언자들은 이미 초등학교를 다니던 꼬마시절이 지나자 연기처럼 산산히 흩어져버렸다. 늘 그들이 강요하는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면 어쩌나 조바심내면서.. 꼬마시절 언젠가 가을 운동회 무렵.. 만국기를 대신해 펄럭이던 꿈이 그려진 나의 이상향은 오늘에 이르러 어디로 사라진 걸까?


매년 오스카가 할때 즈음이면 늘 후보로 노미네이트된 영화들을 찾아보는게 일인데, 이게 올해엔 무슨 조화인지 케이블에서도 생중계를 보이콧하고.. 겨우겨우 아프리카TV로 abc의 실황을 보고, 그렇게 이번엔 멀리멀리 관심밖으로 달아나나보다 하고 있는데 케이트 윈슬렛이 그 뒷심을 발휘했다. 뭐 사실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된 작품을 다 보지못했지만 체인질링의 안젤리나 졸리도 그녀 본래의 툼레이더나 미세스스미스의 강렬한 이미지와 대비되는 가녀린 크리스틴 콜린스를 적절하게 잘 소화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감성적인 강약조절이 유연하고 인물의 깊이를 연기하는 탁월한 능력의 케이트 윈슬렛 앞에서 그녀는 일단 몇년간 더 절치부심해야 할 듯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평생의 조언자를 잘 선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셈 멘데스는 아무래도 늘 케이트의 곁에서 작가의 입장에서 해줄 수 있는 온갖 어드바이스를 다 해줄 것이므로. 다만 안젤리나 졸리의 경우 핸섬한 브래드 피트와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을 할때마다 파파라치들을 고려하느라 온갖 시간을 다 허비하고 있는 줄도 모르지. 뭐 이건 물론 99% 농담임)


(왼쪽 윗줄부터 잭 도슨, 로즈 도슨, 에이프릴 윌러, 프랭크 윌러)


타이타닉호의 대참사 속에서 가까스로 구조된 잭이 로즈를 데리고 레볼루셔너리 로드로 이사라도 온 듯 보였다. 하지만 이 영화속의 디카프리오는 가난 속에서도 열정이 충만했던 젊은 화가 잭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영화속의 프랭크는 늘 반복되는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속에서의 구원과 일탈을 꿈꾼다. 지루함은 잠시잠깐의 외도도 된다. 프랭크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가장 많이 갈등하고 있는 인물이다. 반면에 에이프릴은 자신의 꿈이 깨짐과 동시에 시작된 이 지루하고 반복되는 일상에서 적극적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인물. 아마도 잭을 만나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세속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레볼루셔너리 로드로 온 로즈는 그 현실안에서 그 본래의 보헤미안 케릭터를 지울 수가 없는 것. 만약에 당신이 11년만에 다시 보는 이 둘의 모습에서 과거의 낭만을 찾으려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면 (아핫 물론 셈 멘데스의 숨은 의도까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런 기대쯤 일찌감치 포기해 버리라고 하고 싶다. 그런 낭만적인 그림에 대한 기대쯤 차디찬 대서양의 바다 가운데나 던져버려!! 이 영화는 이 둘이 내내 지지고 볶고 싸우는게 반이란다.



하지만 둘은 영화의 중반부까지 일찍이 그들이 타이타닉호를 타고 건너온 대서양을 다시 가로질러 파리로의 일탈을 꿈꾼다. 희망에 부풀어 오른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계획을 알리며 맥없던 일상에 봄날의 훈풍을 불어 넣는다. 하지만 이들의 주변 사람들 어느 하나 그들의 계획을 반기거나 옹호하는 사람이 없다. 이웃해 살고 있는 절친 부부는 충격과 환란에 가까운 눈물까지 보인다.

이 젊은 부부를 레볼루셔너리 로드로 안내한 복덕방 아주머니로 추정되는 인물은 바로 케시 베이츠. (여기서 셈 멘데스의 의도에 관해 한번 더 의심을 품자면 그녀는 이미 세속으로 가득찬 타이타닉호의 일등석 칸에서 유일하게 잭과 로즈를 이해하고 감싸주었던 밀리 브라운 여사였던 것. 다만 그녀 역시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오래 살아서 인지는 몰라도 영화 막판 참으로 얄밉게도 군다)

(왼쪽부터 헬렌 기빙스 여사, 밀리 브라운 여사)


이 아주머니가 에이프릴에게 부탁하는 그의 아들 존은 수학적인 재능은 가졌지만 사회부적응의 정신병력을 가졌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그들의 계획을 이해하고 지지한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미쳤다고 손가락질하는 존. 프랭크와 에이프릴 역시 존과 마찬가지로 미친걸까? 이 영화에서 가장 따뜻한 그 순간 에이프릴의 대사가 마음을 울린다.

"미쳤다는 것이 제대로 된 삶을 사는 것이라면.. 나는 미쳐도 상관없다."

누군가 어디서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삶의 무료와 허무함이 극에 달아 우울함에 동화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영화를 보고 난 뒤 이상하게도 가뿐한 느낌이다. 뭐랄까? 예방접종이라도 받은 느낌이랄까? 어느 누구나 현재 자신의 삶에 100% 만족하는 삶이란 사실 불가능한 것이다. 가능한 사람이 이상한거지. 호주 퀸즈랜드의 어느 섬에서 한가로이 사진이나 찍으며 유랑을 하는 댓가로 6개월에 1억 4천만원이나 주는 꿈의 직업을 가졌다한들, 간사한 인간에게 그 많은 돈도 영광도 모두 다 지나면 소비되고 연소될 것들이다.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의 가치와 이상향을 찾아 나아가는 것. 미친놈이란 소리를 듣는다 한들, 이 세상사람 모두와의 경쟁에서 홀로 도태되어 늘 부족한 삶을 살아간다 한들, 삶의 가치는 적어도 나이를 먹고 흔들의자에 앉을 무렵은 되야 알 수 있는 것 아닐까? 벌써부터 변화를 두려워하고 안정만을 쫓아 나약하고 비겁한 삶을 살기에 인간의 삶은 그리 길지 않다. 지나고 나서 프랭크처럼 후회해도 소용없다 이말이다.

아메리칸 뷰티의 셈 멘데스는 자신의 아내를 내세운 이 영화에서 역시나 대단히 맹렬한 모습이다. 영화는 처음 시작부터 끝까지 불필요한 사족없이 두 사람에게 닥친 태생을 알 수 없는 비극을 찬찬히 깊이있게 조명한다. 디카프리오는 11년전 그 곱디고운 용모가 온데간데 없는 얼굴에다 울상까지 하고 앉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11년이란 세월이 쌓은 깊은 내공이 보인다. 얼핏얼핏 보이는 이마의 주름만큼이나 그의 프랭크가 오늘에 이르러 나에겐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브래드 피트의 벤자민 버튼에 결코 뒤질 것이 없는데도 이번 오스카에서 후보에 조차 오르지 못한 것은 분명 아이러니. 다만 이미 여러해에 걸쳐 오스카가 그를 염두에 두고 있는 이력을 감안할때 오스카가 그에게로 가는 날이 분명 멀지 않은 듯해 보인다. 케이트 윈슬렛만 보아도 5전 6기 정도는 해야 오스카가 그녀를 허락하니 말이다. (다만, 그녀는 The Reader를 통해 오스카를 수상했다)



영화는 결국 그들을 조롱하는 세상 사람들의 시끄러운 잡음을 누군가 조용히 꺼버리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그리고 역시나 나는 엔딩 크레딧이 다 멎을때까지 혼자서 먹먹하게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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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전에, 그토록 갈구하던 워낭소리를 봤다. 우호호
홍대 시네마 상상마당에서 하루에 딱 3번 상영하는데, 인터넷으로 예매를 하려 했으나..
카드 가맹점이 아닌 관계로 에러... 결국 중간에 잠깐 가서 예매하려는데 2시까지 점심시간ㅠㅠ
(왜 점심시간이 1시 15분 ~ 2시 인거야? 비상식적인 식사패턴으로 인해 나는 25분간을 바로 옆 소품매장에서
기웃기웃 거려야 했고.. 또 결국엔... 뜻하지 않게 핸드폰고리를 충동구매하고 말았다)

총 50석도 안되는 작은 상영관인데, 이미 거의 대부분의 좌석은 팔려나간 상태다.
작년에 과제 제출때문에 인디영화 보러왔을때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개념의 단계. 와우.. 정말 대단하구나..

보고싶은 영화가 생기면 느끼게 되는 설렘이 언제부턴가 하나둘씩 잊혀져가는 마당에 이 영화는 이상하게도 처음 그 순간부터 끌리기 시작하더군.. 이야기, 음악, 사람들, 그리고 초록색 떼깔까지..



사실.. 이 영화에 쏟아지고 있는 최근의 폭발적인 관심은 많이 의아한 편이다.
이 영화 말고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독립영화를 본 적이 있었나?? 학부 4년 교양과목을 통틀어서도 숱한 영화관련 수업을 들었음에도 난해한 플롯과 형이상학적인 구성, 실험적인 편집이 난무하는 독립영화뿐이었다. 
이 영화와 같이 순하고 착한, 순박한 다큐멘터리 독립영화는 이게 처음이었다.

사실 다큐멘터리라는 것 자체가 영화라는 장르안에서는 그 성격이 모호해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영화를 본다고 하면.. 그것도 친절히 영화관이라는 곳까지 직접 가서 돈까지 지불하고 본다고 하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영화를 소화함에 있어서 일종의 강박관념에다 의무감까지 더해지는 것이다. "분명 뭔가 심오한 뜻이 담겨져 있을거야.. 화면은 모두 구조화되어 있고.. 단서도 놓치면 안돼!! 즐겨야 한다구!!" 이런 대중상업 영화의 광들에게 돈을 내고 친히 극장에까지 나아가서 다큐멘터리를 보라니. 그러한 편견은 나에게는 이미 몇 해전 마이클 무어에 의해서 깨어졌고,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그와 같이 마법과도 같은, 강력한 울림이 전해지는 다큐멘터리영화를 만나게 된 것이다.


다만, 이 영화는 마이클 무어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현란한 편집과 구성, 재치있는 나레이션 등 과는 180˚ 다른 생(生)날것의 뭉클함이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아주 본능적인 감성. 한 도시의 바쁜 일상에 지쳐서 숱한 경쟁과 반목만을 강요하는 이 시대의 숙명으로 인해 외면해야만 했던 우리들의 본질적인 따뜻함과 사랑, 우정, 배려가 있다.


더 이상 무리를 해서 일을 하면 안된다는 것을 자기 스스로 누구보다도 더 잘 알면서도, 할아버지도 소도 그렇게 쉽게 손에서 일을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에겐 서로 40년을 함께하면서 걸었던 길, 고된 노동, 그 모든 것이 그대로 자신들의 모든 것이었으니까. 어느새 늙고 병들어 이젠 숙명과도 같은 죽음을 인정해야할 시간임에도 그것은 그들에게 전부였으니까. 할머니의 숱한 잔소리와 신세한탄을 알면서도 끝까지 그렇게 고집을 피우는 것. 그게 그 삶의 방식이니 말이다.


신세한탄을 하면서도 두통에 괴로워하는 할아버지의 이마를 따뜻하게 감싸는 할머니의 손길에서, 행여라도 제초제를 먹지는 않을까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번거롭게도 매번 짚을 썰어 쇠죽을 끓이는 그 노고에서, 우리는 그 어떤 영화에서도 보지 못했던 살아있는 그 것. 생(生)날것의 뭉클함을 본 것이다.



1960년 한국을 찾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펄 벅은 농부가 볏단을 실은 소달구지를 끌면서 자기도 지게에 볏단을 지고 가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농부는 자신의 지게를 달구지에 실으면 편하고 좋을텐데.. 소의 짐을 덜어주려는 저 마음이 내가 한국에서 보고 싶었던 것이다.” 서로 30년 이상의 긴 세월을 함께하면서 진정으로 상대를 생각하고 신뢰하고 사랑하고 있구나.




결국 소는 할아버지 곁을 떠나고 말았다. 할아버지의 허전한 곁을 지키는 마당을 가득 채운, 수도 없이 높게 쌓인 땔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뒤로하고 엔딩 크레딧이 흐르고.. 음악에 여운을 느끼며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이 영화의 엔딩크레딧은 내가 느끼고 내가 받은 감동과 전율에 비해 너무나 짧고 협소했다. 수백억의 제작비를 호가하는 대작영화의 그 끝도 없는 엔딩크레딧은 인간의 작품이라기보다 물질, 투자대비이윤, 즉 돈이 만든 작품이란 생각이 드는 건 왜 일까? 그리고 오늘. 더 오랜시간 감흥에 젖어있길 원하는 이 영화의 너무도 짧았던 엔딩크레딧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일은 결코 물질과 돈으로 이뤄낼 수 없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워낭소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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